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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에 말을 걸다

 

- 유아영의 ‘갈색 형상’과 새로운 시선의 탄생 -

 

 

 불안(anxiety)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실체 없는 가능성에 대한 예감에서 비롯하는 불안은 삶의 의미를 의심하게 만들고, 일상을 위태롭게 한다. 불안은 둔탁하면서도 날카롭고, 조용하면서도 마음을 찢을 만큼 시끄럽다. 우리의 존엄을 갉아먹고, 신뢰를 훼손하며, 가슴 깊은 곳에 무거운 돌을 얹기도 한다. 깊은 호수의 불길한 잔잔함 같기도, 성난 파도의 격렬함 같기도 하다. 반목과 질투심, 욕망과 의심, 설명할 수 없는 자기혐오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부정적 정서의 밑바닥에는 언제나 불안이 집요하게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불안은 존재를 각성시키기도 한다. 

 불안은 익숙한 일상과 질서로부터 우리를 떼어내어, 존재의 근원에 자리한 낯섦과 불확실성을 정면으로 들이민다. 우리는 불안 속에서야 비로소 삶의 외피를 걷어내고, 자기 존재의 심연(深淵)을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고통스럽지만, 살아있음의 의미와 그 무게를 떠올리게 하는 하나의 초월적 계기이기도 하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가 통찰했듯이, 불안은 존재를 무화(無化)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존재 전체를 낯설게 만들며 존재 자체를 드러내는 특별한 정서이다. 그는 일상의 의미망이 무너지고, 세계의 친숙함이 해체되는 이 존재론적 기반을 “존재자 전체가 물러서고, 드디어 존재가 드러나는 순간”으로 설명한다. 그래서 하이데거에게 불안은 심리적 위기라기보다는, 실존이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가장 본질적이고 심층적인 계기이다. 우리는 불안 속에서 삶의 무의미함과 마주하고, 그 절망 밑바닥에서 진정한 의미의 가능성을 길어 올리게 된다. 존재는 그제야, 우리 앞에 말없이, 천천히,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유아영의 회화는 바로 이 불안의 언어와 감각을 빌려 온다. 

 작가가 그려낸 얼굴들은 여행 중 우연히 마주친 이들, 일상의 이웃, 가족, 그리고 인터넷 등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이미지들이다. 누군가는 앉아있고, 누군가는 산책하거나 책을 읽으며, 또 어떤 이는 수면 위에 둥둥 떠 있다. 별다를 게 없는 삶의 장면들, 평범한 사람들의 지극히 평범한 단면들이다. 그런데 이 이미지 속에는 묘하게도 특별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작가와 대상 사이에 발생한 비범한 ‘시선의 사건’이다. 작가가 보여주려는 것은 특정 인물이나 상황의 재현이 아니다. 이들은 모두 평범함 안에서 ‘포착된 이미지’이며, 작가가 던진 시선의 방향과 강도에 따라 새롭게 구성된 존재들이다. 유아영의 시선은 단순한 시각 행위를 넘어서, 불안의 그림자를 따라 움직인다. 그리고 어느새 무심한 일상은 존재의 예감으로 전환된다. 

 

 작가의 화면을 지배하는 ‘갈색’ 색조도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시선을 망설이게 하는 동시에, 실존을 떠오르게 하는 양가적 감각의 색이다. 우선, ‘갈색’은 시각과 판단의 중립성 속에서 형상이 다시 구성되는 정서적 배경이다. 갈색 톤으로 칠해진 인물들은 모두 구체적인 정체성을 거부한다. 누구를 지시하지 않으며, 어떤 재현의 체계에도 쉽게 포섭되지 않는다. 이들은 차라리 낯선 서사와 불연속적인 사건의 주인공들이다. 삶의 형태와 내용은 가늠할 수 없지만, 그 내면의 존재 방식은 이 ‘시선의 사건’을 통해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오른다. 또한 갈색은 시간의 물질적 흔적이기도 하다. 그것은 “분명히 한때 존재했었음(ça a été)”, 즉 상실과 부재를 확정 짓는 ‘사진적 시제(photographic tense)’를 넘어서는 실존의 지속을 기록한다. 이 강력한 ‘죽음에 대한 저항’은 붓의 운동을 따라 화면을 가로지르며, 번지는 듯하면서도 또렷하게 실존의 제스처를 새겨 넣는다. 결국, 유아영의 ‘갈색 형상’은 유한한 삶의 시간적 기준에서는 퇴색이지만, 실존의 기준에서는 오히려 창조적 발색(發色)이다. 그것은 사라진 것들을 감싸는 색이 아니라, 부재(不在)를 오늘의 긴장 속에 다시 불러내고, 피할 수 없는 죽음의 필연 속에서도 존재를 깨워 끝내 일으키려는 빛의 또 다른 역량이다. 

 

 형태감은 또 어떤 방식으로 감각을 뒤흔드는가? 

 뒷모습으로 돌아선 인물들과 잘린 프레임 속에 숨겨진 얼굴들은 마치 초점이 빗나간 사진처럼, 흐릿한 윤곽과 질료의 떨림으로 그려진다. 리히터(Gerhard Richter)와 뒤마(Marlene Dumas)의 회화에서 느낄 법한 존재론적 속도감도 있고, 피슬(Eric Fischl) 특유의 현대적 공허함도 깊게 배어 있다. 작가는 반짝이는 윤슬로 시적 언어를 발명하고, 먼지처럼 흩날리는 얼굴들로 불안의 파괴적인 모호함을 암시한다. 이제 감정의 잔해 위에서 세계는 더욱 섬세해진 시선에 포착된다. 번지고 흘러내리는 물감은 형태를 풀어헤치며 새로운 감각의 문을 열고, 거칠게 중첩된 채색은 형태의 조건을 삶의 복잡함 속에서 예고한다. 작가는 그렇게 불안에 말을 건다. 감각의 표면을 가로질러, 불안이 남긴 돌발적인 리듬에 다가간다. 외관을 부수며 고독과 우수(憂愁)에 형태를 부여하고, 얼굴을 잃은 얼굴로 우리의 내면을 마주하게 한다. 

 

 불안은 피하고 싶은 감정이지만, 예술은 종종 그 안에서 시작된다.

 유아영은 불안과 실존이 교차하는 변증법적 긴장 속에서 삶을 관찰한다. 그가 불안과 소외, 정념과 고독의 전형에 귀 기울이는 까닭은 삶을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을 긍정하고 사유하기 위함이다. 한나 아렌트가 말하듯, 모든 사유는 ‘나’와 관련된 일들에 대해 ‘나’ 자신에게 말을 거는 행위이며, 참된 존재 방식은 분리된 자아와 나누는 침묵의 대화, 곧 고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무심히 던져진 세상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우리의 노력은 늘 실패를 동반하지만, 우리는 고독의 철학적 힘과 함께 그 실패를 견디는 용기를 발휘할 줄도 안다. 유아영의 예술도 바로 그 지점에서 새로운 시선을 탄생시킨다. 불안을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그 존재론적 깊이를 따라 사유하는 시선, 바로 그 ‘존재하려는 용기’를 화면 위에 흩뿌린다. 그렇다면 그의 회화는 단절의 산물이 아니라, 자아와의 미세한 조율이자 세계와의 균형감을 회복하려는 섬세하고 내밀한 투쟁일 것이다.

 

 깊이 있는 존재의 이야기는, 불안이라는 정서적 균열 없이는 들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이야기 속에서 익명의 초상들은 더는 사라짐의 표상도, 낯선 타자성의 반영도 아니다. <남겨지다, 그리고 존재하다>(2014), <Being 연작>(2016), <던져진 존재>(2017) 등의 2010년대 작업부터, <저 너머에>(2024), <An Ordinary Existence>(2025), <거기 누구 없소>(2025) 등의 근작에 이르기까지, 작가가 그린 갈색 인물들은 모든 것으로부터 소외되고 뒤처진 존재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불안과 결핍 속에서 고독을 발견하는 ‘위대한 실패자들’이다. 불완전함을 묶어 끌며, 묵묵히, 그러나 강인하게 ‘자기 안의 미지(未知)’를 향해 걸어가는 존재들. 바로 그들이 유아영이 그려낸 ‘우리 자신’이며, 실존이 드러내는 진실한 얼굴이다.

이 재 걸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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