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기억으로 시대를 건네다
유아영은 동시대 한국 회화가 다시 ‘인간’과 ‘몸’으로 되돌아오고 있음을 가장 조용하면서도 깊이 있게 보여주는 작가다. 빠르게소비되는 이미지와 즉각적인 메시지가 지배하는 시대 속에서, 그의 회화는 속도를 거부하고 감각의 깊이를 선택한다. 특정 사건이나 이야기를 전면에 드러내기보다, 인간이 세계 속에 존재하는 방식 그 자체를 오래 바라보게 만드는 회화, 그것이 유아영 작업의 본질이다.
유아영은 회화를 통해 인간의 내적 풍경과 신체의 기억을 저장해온 작가로, 일상의 장면 속 인물을 주요 모티프로 삼아 감정과시간, 기억의 층위를 화면 위에 축적해왔다. 그의 인물들은 특정한 인물로 규정되지 않는다. 바다 위에 떠 있는 몸, 들판을 걷는뒷모습, 물가에서 허리를 굽힌 신체는 모두 ‘누군가’이면서 동시에 ‘우리 모두’인 익명의 존재들이다. 이러한 익명성은 그의 회화가 개인의 초상을 넘어서 동시대 인간의 정서와 존재 상태를 보편적으로 포착하게 한다.
-그리고 정동(情動)의 회화-
유아영의 화면에서 인체는 풍경 속에 놓인 하나의 대상이 아니라, 풍경과 섞이고 스며드는 감각의 중심으로 존재한다. 바다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신체를 떠받치는 또 하나의 살(肉)처럼 요동치고, 들판과 하늘은 인물의 내면 정서와 맞물린 하나의 정동의장(場)으로 작동한다. 특히 갈색, 청색, 살빛이 겹겹이 축적된 그의 색채는 빛의 재현이 아니라 ‘시간이 퇴적된 흔적’에 가깝다.
물감은 얇게 스며들거나 두텁게 얹히며, 번짐과 긁힘, 덧칠의 흔적 속에서 하나의 신체가 만들어진다. 이 신체는 해부학적 정확성보다 감각적 실존을 우선한다. 그의 인물은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지도, 극적인 사건 속에 놓이지도 않는다. 다만 걷고, 떠 있고, 바라보며 존재할 뿐이다. 바로 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한 상태’ 속에서 유아영 회화는 오히려 인간 존재의 가장 본질적인 진동을 길어 올린다.
-현대미술사 속 계보-
유아영의 회화는 장르적으로 현대 구상회화에 속하지만, 전통적 사실주의와는 분명한 거리를 둔다. 그의 작업은 20세기 표현주의 이후, 신체가 감정과 심리, 존재론적 불안을 담는 장으로 전환된 흐름과 맞닿아 있으며, 특히 독일 현대회화의 정서적 깊이와프랑스 회화 특유의 물질적 색채 감각이 한국적 정서와 결합된 양상을 보인다.
또한 그의 회화는 사진적 재현과 추상 회화가 충돌하고 섞이는 동시대 회화의 중요한 경향을 충실히 반영한다. 형상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언제든 물감과 흔적으로 해체될 수 있는 상태에 놓여 있으며, 이 불안정한 경계가 바로 오늘날 회화의 동시대성을 드러낸다.
- ‘느린 회화’와 존재-
현대미술이 점점 더 개념과 시스템, 기술 중심으로 이동하는 가운데, 유아영의 회화는 다시금 ‘보는 행위 그 자체’의 윤리를 회복시킨다. 그의 그림 앞에서 관객은 설명보다 먼저 머무르게 된다. 즉각적인 해석보다, 색과 질감, 신체의 자세, 화면의 호흡을 천천히 따라가게 된다. 이는 오늘날 다시 주목받는 ‘느린 회화(slow painting)’의 중요한 성취이기도 하다.
미학적으로 볼 때, 유아영의 인물은 단순한 재현 대상이 아니라 세계와 접촉하는 신체 그 자체로 기능한다. 메를로-퐁티가 말한‘살(flesh)의 존재론’처럼, 그의 인체는 주체와 객체의 경계를 넘나들며 세계와 직접 맞닿는다. 바다에 몸을 맡긴 인물은 자연을바라보는 주체가 아니라, 자연 속에 잠긴 하나의 감각으로 존재한다. 이 지점에서 유아영의 회화는 인간 중심적 시각에서 벗어나, 인간과 세계가 서로 섞이는 동시대적 존재론을 조용히 제안한다.
-동시대 한국 미술 속 위치-
빠른 생산과 빠른 소비가 미술의 가치마저 압도하는 시대에, 유아영의 회화는 오히려 느림과 숙성, 축적이라는 가장 오래된 미덕을 통해 오늘의 회화를 성찰하게 한다. 그는 과도한 기호화도, 과잉 개념화도 택하지 않는다. 대신 회화가 가진 가장 근원적인힘, 즉 물감과 신체, 감각과 시간의 관계를 정직하게 밀고 나간다.
이로써 유아영은 동시대 한국 회화 안에서 ‘정동 회화’, ‘존재론적 인물 회화’의 중요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 그의 그림은 화려하지 않지만 오래 남고, 강하지 않지만 깊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오늘날 한국 회화가 세계와 다시 연결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통로가 되고 있다.
유아영의 회화는 시대의 소음을 크게 고발하지 않는다. 대신, 시대를 살아가는 한 인간의 몸이 어떻게 자연과 시간, 기억 속에서흔들리며 존재하는지를 묵묵히 보여준다.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은 말이 없지만, 그 침묵 속에는 동시대 인간이 감내해야 하는 고독과 불안,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지속하게 만드는 미세한 희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그리고 그의 회화처럼 오래, 깊게, 보는 이의 안쪽으로 스며든다.
금보성 (금보성 아트센터 관장, 백석대 교수)